“엄마 새 운동화 사줘, 나이키 세일하던데!”.
중학교 2학년인 아들 녀석이 멀쩡한 신발을 두고 새 운동화를 사달라고 졸랐다.
“안돼, 아직도 신을만한데 뭘 또 사니!”.
일언지하에 거절은 했지만 그날로 입이 한발이 나온 녀석은 공연히 툴툴거리며 말도 잘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다 멋진 운동화를 신고 농구를 하는데 본인만 후진모양이라나 어쨌다나. 어쨋건 며칠을 버티다보니 ‘저러다 공부도 안하고 뻗나가면 어쩌나 싶어 할 수 없이 돈을 주며 “이번 월말고사 때는 점수 잘 받아와야 돼!”하고 다짐을 받았다. 그러나 입을 헤헤거릴 그때 뿐 지나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나도 알고, 녀석도 알고 있다.
자식이 뭔지 ’이렇게 키우면 안되는데’ 하고 생각은 하면서도 막상 닥치면 녀석이 해달라는 것은 웬만하면 다 들어주게 되니 너무 여유가 있어진건지 아니면 내가 교육을 잘못시키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장롱을 정리하다가 대학시절 자취할 때 썻던 낡은 일기장 한권을 발견했다. 무심히 펼쳐보니 주말에 고향집에 들러 반찬을 싸오던 시절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시골에서 대학공부를 시키는 일은 농사짓는 부모로선 여간 벅찬 일이 아니었다. 딸을 서울까지 보내 꼭 공부를 시켜야하냐며 엄마와 다투시던 완고한 아버지의 목소리를 잠결에 들으며 어떻해든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날도 모처럼 집에 들렀는데 어머니가 안 계셨다. 서운한 마음으로 김치라도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아버지가 작은 보퉁이 하나를 불쑥 내미셨다. “김치랑 김 조금 쌌다. 밥은 절대 굶지 말아야 혀." 평소 살가운 말 한마디 하지 않으시던 아버지였기에 나는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곧 '그래, 우리 아버지는 이런 분이셨지' 하는 생각과 함께 옛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초등학생 때 운동화 한 켤레를 가지고 거의 일년을 신어야 했던 시절,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비 오는 날이었다. 해진 신발 밑창으로 들어온 빗물로 어느새 양말이 축축히 젖어 버리기 일쑤였다. 그런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새 신발을 사 달라고 투정을 부리곤 했다.
"아버지, 운동화 사주세요. 또 양말이 다 젖었단 말예요." 내 말에 아버지는 말없이 담배만 피우셨다. 아버지의 그런 냉담한 태도에 나는 일찌감치 새신발을 포기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젖어있을 운동화를 생각하며 기분이 상해서 토방에 내려서는데, 운동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운동화를 사 줄 형편이 못 되었던 아버지는 새벽같이 일어나 부뚜막에 젖은 운동화를 올려놓고 군불을 지피셨던 것이다. 그날은 하루종일 발도 마음도 따뜻했던 기억이 되살아나 나는 낡은 일기장 위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가난했던 부모와의 추억이 이렇듯 가슴 저리고 아리게 다가오는데, 내 자식은 나와의 기억을 어떤 모습으로 떠올릴까 생각하니 웬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어느 책에서 ‘어렸을 때의 가난은 인생의 큰 스승’이라고 씌여진 문구가 떠오른다. 그때는 그 말이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는 그 말이 ‘진리’에 가깝다는 느낌이 오니, 풍요로운 시절, 과연 어떻해 하는 것이 가장 자식을 슬기롭게 잘 키우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