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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아버지는 늘 바쁘고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저녁식사는 거의 엄마와 나 둘만의 조촐한 자리였고, 가끔의 나들이도 엄마와 둘이서만 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어쩌다 아버지와 마추지면 낯선 아저씨처럼 어색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잠결에 엄마 아빠의 말다툼 소리가 들렸다. “당신, 일도 없이 나가는 거 다 알아요. 마침 내가 할 만한 일이 있다니 내일부터 나갈께요. 진수가 봄방학이니 그 동안 부자지간에 서먹했던 것도 풀고 잘 지내봐요." 그리고 이튿날 눈을 뜨자 엄마는 없고 신문을 보고있는 아버지의 등만 보였다. 난 가슴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밥을 먹고, 책을 펴 들었지만 눈은 자꾸 문 쪽으로 갔다. 차라리 아빠가 나가기라도 했으면 싶었다. 화장실 가는 척 슬며시 뒤돌아보니 신문만 내려다보는 아빠의 뒷모습이 웬지 쓸쓸해 보였다. '잘못 걸린 전화라도 왔으면…'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는데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그때 전화벨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기다렸다는 듯 아버지가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아...그래 기다려라...." 반가움에 찼던 아버지 목소리가 이내 잦아들었다. 내 친구 전화였던 것이다. 전화를 받으니 친구란 놈은 대뜸 "너희 아빠 왜 회사에 안 갔냐? 회사에서 잘렸냐?" 하고 물었다. "임마, 짤리긴 뭐가 짤려, 우리 아빠가 무슨 도마뱀 꼬린 줄 아냐, 짤리게!." 나도 모르게 소리를 치고는 전화기를 ‘꽝’ 내려놓는데 아버지는 여전히 못들은 척 신문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웬지 죄를 지은 것처럼 마음이 찔끔했다. 힐끔힐끔 눈치를 보던 나는 문득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주머니를 뒤졌다. 오백 원짜리 동전 한 개와 백 원짜리 동전 여섯 개를 털어 단숨에 비디오 가게로 달려갔다. "숨이 턱에 찬 걸 보니 새로 나온 만화영화 소식을 듣고 왔구나. 오늘 아침에 나온 거야, 아주 아슬아슬하고 신나는 모험이야기지!" 비디오가게 아저씨는 뭐든지 다 안다는 듯 새 비디오를 뽑아주었다. "새로 나온 만화영화가 있다고요?" 순간 마음이 흔들렸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젓고는 "저～, 그게 아니고요. 어른이 좋아하는 비디오 한편 골라주세요. 무지 웃기고 재미있는 걸로요." 아저씨가 골라준 비디오를 들고 쏜살같이 달려와 보니 아버지는 우두커니 베란다에 서 있었다. 나는 말없이 비디오를 틀어 아버지를 유인했고, 우린 나란히 거실에 앉아 비디오를 보며 ‘헤헤’거렸다. 그리고 점심엔 라면을 끓여 이마를 맞대고 한참을 후르륵거리는데, 문득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보니 설핏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빠, 왜…?’ 나는 차마 물어볼 수가 없어 그냥 못본 척 그릇을 비우곤 다시 TV를 틀었다. 아버지 기분이 조금 나아보여 다행이었다. 그때 주인공 남자와 여자가 뽀뽀하는 장면이 나오자 “어허 이건 엄마랑 봐야 하는데” 하며 커다란 손으로 내 눈을 가리는 게 아닌가! 난 갑자기 그 손을 꽉 잡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진 갑자기 멋쩍어진 듯 “엄마 오늘 고생했을 텐데 우리가 맛있는 저녁 해놓자. 엄마가 뭐 좋아하지?" 하며 서서히 일어났다. 우리는 동태 매운탕으로 정했고, 아버진 낚시터에서 익힌 솜씨라며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엄마가 오고 정말 오랜만에 세 식구가 함께 저녁을 먹었다. 냄새는 근사했지만 맛은 별로였던 동태찌개를 맛있는 양 떠먹으며 문득 얼굴을 쳐다보니 가만히 나를 보고 있던 아버지가 한쪽 눈을 찡끗거렸다. 피곤함도 잊은 채 엄마는 마냥 행복한 얼굴이었고, 난 뭔가 부드럽고 달콤한 기운이 집안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 마음의 호수 중 발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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