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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바람이 제법 쌀쌀해지고 겨울이 성큼 다가왔지만 아직도 가을 추수를 다 못한 노인들의 손길은 바쁘기만 하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콤바인 소리는 오늘따라 더 크게 들려오고 황금빛 물결이 출렁이는 들판은 하나씩 까까중머리가 되어만 간다. 텅빈 들판에는 허수아비만 남아 오늘도 자기 소임을 다하려는 듯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여름에 보았던 허수아비는 군인처럼 늠름해만 보였는데 지금은 힘없는 노인이 되어 쓸쓸함과 외로움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기계가 지나가면서 직접 포대에 자동으로 담아지며 다 하고 난 후에는 포대를 집에까지 직접 날라 주기까지 하는 영농과학이 발달하여 노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반가운 콤바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콤바인이 없어서 모든 일을 수작업으로 하나하나 해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가을 추수때만 되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가족끼리 서로 모여서 하다보니 가족 간의 따뜻한 정은 지금보다 훨씬 새록새록 피어나지 않았나 싶다. 내 어릴적 초등학교때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면사무소에 다니시고 큰오빠는 고등학생이 되어 도시에 있는 친척집에서 하숙을 함으로써 집안일은 모두 엄마와 남은 형제들 차지가 되곤 하였다. 그래서 작은오빠와 동생과 나는 학교에만 갔다 오면 논으로 가서 엄마를 도와드려야 했었는데 우리가 볏단을 뭉쳐놓으면 엄마는 빠른 솜씨로 한 단씩 묶어 놓으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녁 무렵이 되고 아버지가 논에 오셔서 짚가리를 쌓기 시작했다. 작은오빠는 한 번에 여러 단씩 나르고 동생과 나는 두 단씩 나르기에도 얼마나 벅 찼는지 모른다. 이렇게 볏단을 한단 한단 나르다 보면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늦가을의 추위는 점점 엄습해 왔지만 아버지가 정성을 다해 짚가리 쌓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 일을 끝날때까지 누구하나 그만 가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쌓는 짚가리 솜씨는 정말 대단했다. 빨리도 쌓아 올렸지만 모양새도 나무랄 데 없는 멋있는 여러 개의 탑으로 완성되어 갔다. 옆논에 쌓여 놓은 것은 왠지 불안정해 보였지만 우리 논 짚가리는 아무리 비가오고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아 마을사람들은 우리 논 짚가리를 보면서 어찌나 부러워하던지 그럴때마다 아버지의 어깨가 더커 보이기만 했었다. 이렇게 쌓아 놓은 짚가리는 논에서 길게는 한 달이나 버티고 서 있었다. 마치 초가집이 옹기종기 붙어 있듯이 하나의 장관을 이루면서 말이다. 아버지는 비라도 올 것 같으면 한 밤중에도 비닐을 가지고 가서 하나 하나 옷을 입히고 했다. 그러면 탑들은 온통 하얗게 변해갔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 논에 탈곡기계가 들어오고 탑들이 하나씩 허물어 가면 장관을 이루었던 짚가리 형체는 어디론가 사라져만 가고 우리들 마음은 황량한 논만큼이나 허전했었다. 추수기가 되면 힘든 일은 언제나 작은오빠가 다 한 것 같다. 탈곡한 볏가마를 어깨에 메고 나르는 것도 오빠가 도맡아 하곤 했다.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 한 마디 안하고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묵묵히 일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빠는 어릴적 힘든 일을 혼자 해냈듯이 죽음조차도 침묵으로 맞이했던 것일까? 4년전 이맘때쯤 출근하던 오빠는 그렇게 말 한마디 못하고 짚가리가 되어 우리곁을 홀연히 떠나갔다. 그토록 가을을 사랑하고 가을의 추억을 그리워했던 오빠이기에 가을에 우리곁을 떠나간 것인지도 모른다. 해마다 돌아오는 가을이지만 가을이 오면 텅 빈논을 바라보는 내 눈에는 시간이 멈추어 어릴적 논에서 볏단을 나르는 오빠와 짚가리만 가득 차 보일 뿐이다. 지금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짚가리이지만 "짚가리"를 생각하면 언제나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이 든다. 오늘 또 그 추억 속에서 기어 나오고 싶지 않은 날이다. 김옥순: <농민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행우문학> 수필부문 우수상 제1회 감고을백일장 입상, 영동문인협회원 (현재 용산 매금보건진료소 근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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